여러분은 시를 좋아하나요? 많은 친구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 말고는 특별히 시에 대한 경험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라고 하면 머리 아프고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을 갖기도 하죠. 특히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경쟁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하는 오늘날에는 더욱 시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기 어려울 거예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관객들이 이렇게 본연의 의미를 잃어가는 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마주하기 싫은 끔찍한 현실 속에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나가는 할머니 미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화를 보던 관객들 모두 미자의 마음으로 시를 이해하게 되지요. 그녀가 시상(詩想)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어떤 때에 시를 쓰지 못하고 어떤 순간에 시를 쓰게 되는지, 결국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볼까요?

미자는 시를 쓰고 싶은 할머니입니다. 언제나 화사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며,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을 자랑하죠. 그녀는 늘 퉁명스러운 손자도 돌봐야 하고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병든 노인을 간병하는 일도 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도 문화센터를 방문해 시 쓰기 교실을 다니는 열렬한 문학소녀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시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과를 열심히 관찰하고, 나무에 말도 걸어보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지만 선생님이 얘기했던 시상이란 것은 찾아올 생각을 않죠.

게다가 불행히도 시상 대신 가혹한 현실의 무게가 그녀를 찾아옵니다. 바로 함께 사는 사랑하는 손자 ‘종욱’이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것입니다. 피해자 소녀 희진은 이미 강물에 몸을 던진 이후였습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가해 학생들의 아버지들은 돈으로 문제를 덮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미자는 도무지 그 문제에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죠. 합의 문제로 가해자 학생의 학부모가 모인 자리에서 미자는 밖으로 나가 꽃을 보고 시상을 떠올리려 합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철없어 보이는 행동에 다른 부모님들은 “시를 쓴다네요”하고 그녀를 빈정거리기도 하지요. 미자는 희진의 어머니를 만나 상처를 보듬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미자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시골길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말지요. 시상에 빠진 채로 희진의 어머니를 만난 미자는 자녀를 잃은 어머니 앞에서 그만 자연과 삶의 아름다움과 시에 대해 흥분해 이야기를 늘어놓고 맙니다. 돌아서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요. 미자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이 갇혀있던 아름다움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세계에서 동떨어져 마냥 시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을 대면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미자는 희진이 다녔던 성당과 성폭행이 일어났던 과학실을 거쳐 희진이 뛰어내린 다리에 가 섭니다. 그런 자리에서 시상이 떠오를 리 없지요. 빈 메모지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 미자는 병시중 하던 강 노인을 찾아가 그가 요구대로 잠자리를 갖습니다. 과거에 이미 성을 내며 거부했던 일이지만, 희진의 고통에 다가서기 위한 미자의 속죄의식이기도 했습니다. 희진이 죽어야만 했던 현실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고, 때문에 그 앞에서 아름다운 자연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폭력과 추한 욕망 속에서 죽어갔던 소녀의 삶을 끌어올리는 것,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순간, 그녀는 희진의 슬픔과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미자는 다른 부모와 달리 손자 종욱을 직접 경찰의 손에 넘깁니다. 그리고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영화 속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지요. 시 쓰기 교실에서 시를 완성한 사람은 오로지 미자 한 명뿐입니다. 시를 쓰는 교실에서, 시를 낭송하는 술자리에서 시는 모두 우스꽝스러운 오늘날을 대변하듯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미자가 쓴 시만은 미자 자신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집니다. 영화 속에서는 미자만이 시인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시만을 추구하거나 희진을 위로하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죽은 희진을 바라보고 그녀와 하나가 되어 그녀의 마음으로 시를 써내려갔기 때문입니다. 시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세련된 언어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는 단순한 위로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온전히 그 대상이 되는 것, 타인으로 존재하며 진심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입니다. 미자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찾아 헤맬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시상이 자신을 버리고 희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고통으로 걸어 들어갈 때 불현듯 그녀를 찾아왔던 것이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시를 쓰기 위한 미자의 고군분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사람이 살아가는 곳임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삶이 남루하고 비참한 곳으로 추락할 때도 우리를 구원하는 힘은 오롯이 시에 있음을, 서로를 이해하고 고통에 응답함에 있음을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자의 시를 읽는 이는 희진입니다. 첫 장면에서 희진은 물에 떠내려온 시체의 모습이었지만 관객들에게 그녀의 죽음은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고통, 갈등과 선택에 대해 이해한 후에야 관객들은 그녀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시인으로서 그 죽음 위에서, 희진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찾아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과 같은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영화는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