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가볍게 훌쩍 떠났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대로 가만히 참고 있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이 상황을 온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면, 그저 잠깐만이라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 나만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흔하지도 않은 적당한 여행지가 필요하다. 가벼운 여행지로써 필리핀은 장점이 많은 나라이다. 특히 수도인 마닐라는 부족함 없이 즐길거리가 풍부한 알짜여행지다. 많은 사람들이 필리핀의 수도를 마닐라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명칭은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이다. 이것은 7개의 시와 10개의 자치구를 포함한 수도권 전체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메트로 마닐라는 규모가 꽤 크다. 만만히 생각하고 2~3일의 일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면 놓치는 명소와 추억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욕심을 내 몰아쳐 다닐 필요는 없다. 자고로 여행이란 틈틈이 가지는 여유에서 감동과 만족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이번달에는 친숙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메트로 마닐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닐라는 1571년 에스파냐 총독 레가스피가 점령한 이후 약 300년 이상 에스파냐의 식민지 지배의 근거지였다. 이 역사적 사실은 ‘성의 안쪽’으로 해석되는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스페인 인과 스페인계 혼혈만 거주하기 위해 건설된 거대한 성벽 안의 도시로 성당, 관공서, 병원 등 거주하기에 필요한 거의 모든 시설이 내부에 세워져있다. 이곳은 19세기 말까지 번성하다 세계 2차 대전 때 일본의 점령 기지가 되며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때의 처참함은 성벽에 남아있는 대포와 총격의 흔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말이 이끄는 느릿한 마차를 타고 인트라무로스 내부에 들어서면 전반에 깔린 숙연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여느 역사 관광지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마치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기 위해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당시의 에스파냐가 아시아의 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힘의 크기와 뽐내고 싶었던 아름다움이 얼 만큼 이었는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조용한 골목길을 나아가며 낮게 퍼지는 말발굽 소리와 높이 울리는 예식장의 종소리가 더해지면 성의 내부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전함에 평온이 느껴진다.

마닐라는 빈부격차가 심한 도시이다. 부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고, 바짝 긴장한 경비가 주변을 지키고 있으며 최신 트랜드를 읽을 수 있는 커다랗고 깨끗한 쇼핑몰이 가득하다. 반면 가난한 주민들의 지역엔 막 자라난 수풀이 도로에 엉켜있고, 바싹 마른 아이들이 양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고 있으며 쇼핑몰은커녕 작은 마트 하나 찾기 힘들다. 시장이나 가판대에서 생필품을 조금씩 사 쓰는 형편인 것이다. 그리고 주로 빈민가에서 매춘이 성행하기에 이 지역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의 피살 사건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는 마닐라를 위험한 도시라고 인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리핀을 경험해 보았다면 공감하겠지만 주민들의 삶은 소박하고 그들의 미소는 한없이 밝다. 이방인에 친절하고 겸손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내밀면 더 큰 인심으로 다가오는 곳이 이곳이다.

마닐라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최적의 도시이다. 여기저기 산책하기 좋은 숲이 너르게 형성되어 있고 고즈넉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역사 관광지도 있다. 거기다 도시 중심에서 주말 시장이 열려 싱싱한 열대 과일과 전통 음식을 한 자리에서 구경해볼 수 있고 보기 힘든 작품전이 도시 곳곳에서 열려 지루할 틈이 없다. 동남아하면 뜨거운 해변, 시원하게 몰아치는 파도만을 연상했다면 마닐라는 그 편견을 다 깨고 도시가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 무엇인지, 그 즐거움으로 인해 얼마나 완벽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가깝고 부담 없는 여행지를 찾고 있다면 단연 마닐라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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