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에 올라와 같은 반이 된 영우(가명)와 기태(가명)가 자주 입씨름을 벌여 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내가 왜 기태를 골리느냐고 영우를 나무라자, “저만 싫어하는 게 아니어요. 기태는 친구들을 무시하는 데다 늘 잘난 척을 하기 때문에 얄미워요”라며 영우가 툴툴거렸다.
나는 기태를 중심으로 둘을 상담하기로 했다. 학급 교우도 조사에서 기태는 외톨이인 데다 몇몇 친구들에게서는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태는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교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기태의 학습성격유형은 전형적인 ‘탐구형’의 모습이었다.
 

반면 영우는 친구와 놀기를 좋아하고 밝고 천진난만한 성격이었다. 사교성이 있어서 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불평을 하는 영우의 학습성격유형은 ‘이상형’에 가까웠다.
이 두 학습성격유형의 특징이 뚜렷할 때는 서로 화합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기태와 영우가 그런 경우인 듯했다.
기태 어머니는 맏아들인 기태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고, 학습계획을 직접 짜서 기태의 학교생활을 세세하게 관리하였다.
나는 기태를 20회기 정도로 상담을 하기로 하고, 상담 목표를 정해 보았다. 우선 내담자가 어머니의 보호에서 좀 벗어나 주관적으로 행동하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연습을 한다. 급우들이 놀리는 원인을 함께 알아보고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자신의 행동

은 하나씩 교정한다. 그런 다음 친구들의 생활에 동참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우선 기태에게 학급 쓰레기 분리배출을 하는 봉사부장인 응상이를 도와주게 했다. 응상이는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있어서 반에서 친구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음성 꽃동네로 2박 3일 봉사 체험활동을 하러 떠났을 때, 늘 혼자 다니는 기태 옆에 응상이가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영우는, 기태는 도무지 같은 방 친구들과도 뭘 갈라먹지를 않는다, 마마보이인 주제에, 응상이만 아니면 쟤는 완전 왕따일 거다, 하면서 기태 흠을 잡았다.
봉사활동에서 돌아온 기태는 기분이 좋아져서 응상이 이야기를 꺼냈다. “응상이요, 정말 열심히 장애자들을 돌보았어요. 그런데 영우 그 자식은요, 땡땡이만 치고, 놀러온 줄로 아는 건지.” “너는 봉사점수를 따러 간 건 아니고?” 하고 내가 놀리자 기태가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점점 기태에게 친구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상담 때 기태는 응상이가 보던 책이라면서 교양서적을 들고 들어왔다. 입시와 관련된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던 예전 모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 사이 기태와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 듯했다. 기태 어머니는 기태 문제로 곧잘 전화로 하소연을 하였다. 기태가 친구와 어울리느라 성적이 떨어졌다, 말도 하지 않고 반항까지 한다, 하면서 무척 불안해했다.
그러나 상담자가 보기에는 기태는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쩌면 기태가 발달단계상 부모
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단계일 수도 있으니, 기태 어머니가 조금 여유를 갖고 신뢰하는 자세로 보아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안심을 시켰다.
기태가 처음에는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합리화하는 버릇이 있어서 상담자와 라포를 형성하기까지 시일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일단 친밀해지자 학생의 논리적이고 뛰어난 분석력이 오히려 상담에 가속도를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대부분 기태 스스로 해결점을 잘 찾아내곤 했다.(상담자-상, 내담자-내)
상 : “넌, 수업시간에 어떤 선생님이 ‘이건 잘 모르겠다. 내
가 더 연구해 와서 가르쳐 줄게’ 할 때, 어떤 느낌이
들어?”
내 : “**영어 선생님은요, 자주 ‘몰라’라고 말하시는데요,
실은 제일 실력이 빵빵해요.”
상 : “속이 꽉 찬 사람이 모를 때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있
는 거겠지. 그런 모습이 남들에게는 호감을 주는 것
같아.”

그러면 기태는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태가 웅상이와 함께 다니는 다른 친구들과도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격려를 해주었다.

상 : “요즘 내가 너를 보면 기분이 좋아. 네가 오늘은 친구에
대해 무슨 이야길 들려줄지도 궁금해. 친한 친구들이
많아졌나 봐.”
내 : “제가 잘 참잖아요.”
상 : “또 그런 말투. 너, ‘여우와 신포도’의 그 여우처럼 합
리화가 지나치면, 애들이 뭐랄까?”
내 : “속으로 ‘그래 너 잘났다’ 하겠죠 뭐.”

기태는 멋적어 하면서도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젠 예전처럼 영우 이야기만 꺼내도 찡그리던 모습은 거의 없어졌다. 친구들과 어울려 밥을 먹으러 가는 모습도 보였다. 기태가 어머니와 사이가 멀어진 것이 좀 아쉬웠지만 그쯤에서 기태와의 주기적인 상담은 끝내기로 했다. 상담회기가 끝난 뒤에도 나는 자주 두 학생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잘 베풀 줄 모르던 기태가 아예 반 전체 학생들에게 한턱냈다는 말을 들었다. 영우가 더 기뻐 날뛰었다. 기태에게, “네가 요즘 아무 말도 안 해서 네 어머니가 화가 나신 거 같더라”고 하자, “엄마가 정말 친구들 빵을 사올 줄 몰랐어요. 성적도 곧 올릴 거라고 어제 말씀드렸어요”하면서 기태 표정이 환해졌다.
학년이 끝날 때쯤, 영우가 상습적으로 흡연을 하여서 영우 아버지가 학교에 왔다. 영우 아버지는 “늦둥이 외아들이라…,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예요” 하며 사과를 했고, 그 앞에서 영우는 “아이참, 아빠”하면서 어리광을 부렸다. ‘터프 가이’라던 영우의 그런 모습에 기태는, “뭐야, 쟤, 완전 파파보이잖아” 하며 어이없어했다. 영우와 함께 반으로 돌아가던 기태가, “이젠 저 대신 영우 때문에 바쁘시겠어요” 하고 내게 농담을 했다. 나도 두 학생의 뒤통수에다 대고 한 마디를 던졌다. “너희 둘은 인연이 질기네. 어쩌면 선택과목까지 같아? 내년에 너희 둘 또 같은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