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놀림을 받거나 심하면 성적 정체성까지 의심받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만큼은 그도 성장해 있었다. 문제는 고 2가 되면서 대학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였다.
그는 대학에 가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의상공부를 위해 곧바로 디자인학교에 가고 싶었다. 영호가 보기에 요즘은 아이가 원하는 길을 열어주려는 부모님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부모님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명문대를 졸업해 가능하다면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직업을 갖기 원했다. 영호는 그분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고민과 방황이 깊어지다 보니 성적도 자꾸만 떨어졌다.
그러던 중에 그만 부모님이 디자인 스크랩과 스케치를 발견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바탕 소란 끝에 영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오게 되었다.
심리검사와 적성검사를 거쳐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영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재능도 성취욕구도

대단한 만큼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영호의 부모님은 모든 검사 결과와 상담 결과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영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호가 디자인 공부를 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기로 결정했다.

부모 반대로 파멸에 이른 경우도 적잖아 - 원망 때문에 자신의 길 찾지 않기도
반면에 부모가 끝까지 자식의 길을 반대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 케이스도 있다. 나이 서른 후반이 된 지금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부모 원망만 하는 어떤 환자의 예다. 그는 연예계에 진출하는 게 꿈이었고 실제로 그쪽으로 재능이 대단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가 법대에 들어가 법조계에서 일하기를 바랐다. 지독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부모님이 이겼고 그는 법대에 진학해 졸업도 했다.
문제는 그 후에 그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완벽한 백수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그렇게 된 건 모두 부모님 탓이라고 했다. 따라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변하기 전까지는 자긴 절대로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에게 대학 졸업 후에라도 아버지를 설득하거나 아니면 독립해서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어야 한다는 얘기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만큼 부모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매우 병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그의 부모 역시 지난 십몇 년간 그 짐을 고스란히 떠맡고 있는 중이었다.

진로문제 - 부모 자녀 갈등 있을 때는 자녀 의견 더 존중해줘야
그 두 가지 사례는 10대 시절 진로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정신과에는 그런저런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사자가 오기도 하지만 부모들이 어쩔 줄 모른 채로 고민을 호소하는 예도 많다. 아이가 뭘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데 어떤 대학 어떤 학과에 보내야 할지 적성검사를 부탁한다는 것부터, 앞서 영호의 경우처럼 부모 자식 사이에 의견이 달라 갈등 끝에 상담을 원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내가 아이나 그 부모님께 드리는 말씀이 있다. 아이의 진로 문제는 가능한 한 부모와 아이가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면 좋겠지만, 서로 원하는 방향이 다를 경우에는 아이의 의견이 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적성검사와 심리검사다. 합리적인 부모의 경우, 아이가 원하고 검사결과도 아이가 원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면 대개 그 편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도 후회는 남을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왼쪽으로 가는 건 아닌가 하는. 그때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어느 편이 옳고 그르다거나, 어느 편이 낫거나 못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단지 다 각기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라고 당부한다. 아이의 선택보다 부모의 선택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서로 다른 것뿐이다. 그것을 부모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문제는 훨씬 단순하고 명쾌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고집 내세우면 불행 초래, 자녀의 선택을 지지 . 격려하는 부모 돼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끝까지 자기 생각만이 옳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대개 아이의 성취욕구보다 자신의 성취욕구나 보상심리가 더 강한 부모의 경우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행한 사례는 굳이 임상사례를 들먹일 것도 없이 무수히 많다.
사실, 아이가 자신의 진로를 정할 때 가장 좋은 선택은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분명한 아이의 경우 그 선택을 부모가 믿어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아이 인생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있어 자신의 선택을 선생님이 격려하고 지지해 준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이가 진로 고민할 때는 많이 생각하게, 또 많은 정보 접해보게 하며 아이들의 결정에 확신 심어주는 게 바로 부모 역할
앞날에 뭘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아이들에게도 진로 결정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문제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생각을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좋다. 음식도 다양하게 많은 것들을 맛보아야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되듯이 하고 싶은 일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정보를 자꾸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거다 싶은 방향이 잡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자신이 내린 선택에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역할이 아닌가 싶다.
심리학자 웨인 W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능력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그 후에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고 훌륭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

진로문제로 고민하는 우리의 십대들이 이 말의 뜻을 깊이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