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상담소식 10월호

“선생님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가죠?”
배가 아프면 보건실로 찾아 갈 수 있지만 마음이 아프면 찾아갈 곳 없는 것이 우리 학교의 현실이다. 학교상담(school counseling)을 공부하면서 또, 미국 초등학교에서 스쿨 카운슬러 인턴으로 일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학생들이 자신의 고민을 얘기할 공간이 있고 스쿨 카운슬러가 그런 학생들을 다양한 방법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으로 돕는 것이었다. 나는 스쿨카운슬러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고 머리 속에 나의 상담실을 그려나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런 상담실에서 이런 프로그램으로 이런 학생들을 도와야지.’

1999년 6월 난 드디어 부푼 꿈을 안고 서울의 아현초등학교로 복직했다. 발령 인사를 드리러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난 교무실이 아니라 상담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상담실이 있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빈 공간에 소파 2개가 전부. 이곳은 교사 휴게실로도 쓰이지 못하는 창고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거기에다 9월에 새로 부임하신 교장 선생님은 상담실을 없애고 새로운 용도의 방으로 꾸미셨다. 고민 끝에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 흡연실처럼 쓰이던 반쪽 짜리 교실을 상담실로 꾸미고 상담활동을 해보겠다고 건의했고 교장 선생님은 반신반의하면서 허락을 해주셨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상담실 이름은 ‘따뜻한 이야기 방’으로

고 따뜻한 느낌이 나도록 교실 문 전체를 노란색 시트지로 붙이고 문 위에는 방긋 웃는 해님을 걸어 놓았다. 썰렁한 벽은 게시판으로 꾸미고 상담에 필요한 의자와 책상, 각종 놀이 도구와 인형, 고무찰흙과 같은 표현 도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산 없이 상담실 꾸미기. 일종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내 방에 있던 커튼을 떼어다가 상담실 창에 붙이고, 친구가 내다버린 책꽂이를 주워다 상담실로 옮겼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가 쓰던 컴퓨터를 상담실로 옮겨놓고 꾸미기에 재주가 있는 아내의 도움을 얻어 상담실 환경을 꾸몄다. 이런 나의 노력이 가상했던지 교장선생님은 교무회의 석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들, 상담실에 한 번 가보세요. 완전히 신혼방이예요.” 이후에 상담실은 우리 학교를 찾는 손님들의 방문장소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상담실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는데 아무도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는 것이었다. 상담 신청함을 학교 곳곳에 설치하고 교무회의 때 상담신청서를 각반에 배부하고 담임 선생님들께 광고를 부탁드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영어교사로 각 반에 수업을 들어가 보니 상담실에 대한 안내를 받은 학급이 거의 없었고 많은 학급에서 상담신청서 뭉치가 담임 책상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 일은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었다. 학교상담에서 담임교사와의 협력적 관계가 없이는 상담활동이 실패의 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학교상담이 제도화되어 있지 못하고 ‘상담’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인 부정적 인식, 거기에 철저한 담임 책임하의 초등교육 시스템은 학교상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이 실패의 고리를 푸는 열쇠를 담임교사들이 쥐고 있다고 보았다. 담임 교사들이 상담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자신이 담임한 아동을 돕기 위해 거리낌없이 상담교사에게 손을 내밀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학생을 위해 함께 고민하는 협력자로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상담교사인 나의 주과제로 보고 학생들의 상담(counseling)보다는 교사들을 위한 자문(consulting)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내 교사들을 대상으로 ‘ADHD 아동의 이해와 지도’라는 주제로 연수를 실시했고 담임교사들이 학급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상담 프로그램을 매주 소개했다.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토록 선생님들을 속썩이는 ADHD 아동들이 혼낼 아이들이 아니라 도와주어야 할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양대 안동현 교수님의 협조를 얻어 교내 3,4학년 학생들의 ADHD 선별이 이뤄졌고 다양한 자문활동 덕에 담임교사들이 적극 도움을 주었다. 3,4학년 14학급에서 아동 21명이 ADHD로 진단되었고 그 중 1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충동적인 아동의 친구사귀기 프로그램’을 10회기에 걸쳐 부모집단 상담과 병행

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에서 몇몇 학생들이 행동의 개선이 보였고 선생님들의 입에서 ‘요즘 같으면 좀 살 것 같다!’, ‘거기 상담실에서 뭘 하길래….’ 하는 말들이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그후에도 일관되게 상담의 효과를 체험한 담임교사들만이 학생들을 나에게 의뢰한다는 사실이다. 교사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자문:consulting), 해당 학생들을 직접 만나서 돕고(상담:counseling), 보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장면에서 서로를 연결해주는(조정:coordinating) 자문과 상담과 조정의 활동-흔히 학교 상담의 3C로 알려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학교상담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본다.
그렇게 문을 연 ‘따뜻한 이야기 방’이 이제는 우리 학교 특색사업이 되었다. 상담공간은 점점 확대되어 작년에는 집단상담실까지 모두 3곳의 상담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한 동료교사 3명, 거기에 학부모 상담자원봉사자는 9명으로 늘어났다. 3,4,5,6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재량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매주 소집단 심성계발 프로그램이 자원봉사자를 통해 운영되고 두 개의 특활반으로 또래상담반이 운영되고 있다. 특기적성반으로 학습기술향상 프로그램이 실시되고 방과후 활동으로 자신감형성 증진 집단과 품성계발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이와 같은 활동들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담실 운영 과정에서 교사들을 상대로 한 다양한 자문활동이 학교상담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재량활동 시간에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시간을 조정하는 것, 또래상담반 아동을 선발하는 것, 특기적성반에 상담프로그램을 광고하는 것, 방과 후 상담 프로그램에 아동을 보내는 것...이 모든 것은 상담교사보다는 담임교사의 역량이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상담교사가 담임교사와의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때, 상담실은 지금의 ‘보건실’과 같이 외떨어진 곳이 되기 쉽다. 또한 상담실에서 이뤄지는 상담 활동의 전문성이 떨어지면 상담실은 또다시 원로 교사들의 쉼터인 ‘경로당’이란 별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굳게 닫혀있는 학교상담의 문. 이 자물쇠를 열기 위해선 담임교사들과 함께 열기 위한 상담교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서울초등상담교육연구회 연구분과장인 오인수 선생님은 한국청소년상담원 품성계발 교수요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효과적인 학급경영을 위한 집단상담 프로그램> (교육과학사,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