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만화가게였다. 때문에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학교에서 불량한 곳이라고 낙인을 찍어
마음이 늘 어두웠다. 더구나 불량음식이라고 부르는 떡볶이,
오뎅, 팥빙수 등을 파는 곳이니 더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되어 온 나의 콤플렉스였다. 오죽하면 가정방문 때가
되면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시지 못하게 대홍수가
나거나 지진이라도 났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것이다.
그래도 홍수는 나지 않고 우리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다른
아이들의 집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 아버
지와 대화하시고 가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했다. 당시 내게는 만화가게를 한다는 것은 무슨 백정과
같은 천형을 받은 것 같은 직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린이 날만 되면 괜히 경찰관이 와서 아무 만화나 빼 보고는 '불량만화'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연행해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난에 대한 컴플렉스를
한 번에 씻어주는 사건이 생겼다. 중 2 때였던 것 같다. 우리
반의 어떤 아이 하나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는 것이다. 따라가 보았더니
그 애의 집이 그야말로 상자만한 집이었다. 부엌 하나에 손바닥만한
방 하나. 방하고 부엌을 다 합쳐 봤자 요즘 우리 아이가 쓰는 방
하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거기서 아버지 어머니와 식구들이 다
생활하는 것이다. 정말 과장을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는 말이다. 아…너무나
가난하구나…. 그런데 그 아이는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내 밥을 차려 주고 같이 놀았다. 시종 웃으며.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 아이는 저렇게 당당하고 명랑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형편이
더 나으면서도 우리 집을 항상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그
뒤로 나는 가난에 대한 컴플렉스가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누구 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시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자랑 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아이를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청소년기는 무어라 해도 진학이 가장 심각한
눈앞의 문제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렸기
때문에 늘 미술반 활동을 하였는데 그림 그린답시고 학과 공부를 하지
않아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대학처럼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학원에 다니며 재수를 하게 되었다.
한데 이 재수란 것이 어린 마음에 매우 상처가 되어 낙오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재수 시절이야말로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고마운 시기였다. 우선 실패를 경험함으로서
낙오하고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술가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일지 모른다. 글도 많이 쓰게 되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114페이지짜리 순정 만화를 한권 그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실패의 시기를 어떤 의미의 '황금기'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다급하게 공부하여 나중에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미술실에서 생활하였고 학교 교과를 등한히 해서 1학년
말에는 전교 꼴찌를 기록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가시고
겨우 진급한 나는 정말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니
성적은 어느 정도 올라갔다. 그러면서 나는 친구들을 따라 화실을
갔다. 당시 우리 집은 화실비를 낼 형편이 안되었는데 화실에 다니고
싶어 집에는 공짜로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시더니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면서 화실 일을 보게 하면서
그냥 다니게 하셨다. 그런 화실 선생님을 파출소에 불려 다니게 하는
등 말썽도 정말 많이 피웠지만(나는 그 시절 정말 장난꾸러기였다)
그 은혜로 미술대학에 합격했다. 입시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하던 친구가 내 그림을 보더니 이런 터치는 요즘 촌스러워 어렵다고
했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해 소중히 그어 온 나의 선(터치)을
그 학교가 촌스럽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학교는 내가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합격이 되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몹시
기뻐하셨다. 특히 어머니는 만화단속으로 경찰서에 갇혀 있으면서 합격
소식을 들으셨기 때문에 더욱 그러셨다. 당시는 그림 그릴 때의 그
몰입하는 기쁨이 너무 좋아 우리 굶어 죽어도 그림을 그리자고 서로
다독이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도 다른 친구들은 꿈도 못꾸는
여학생을 가까이 지내는 일로 부러움을 샀지만(왜냐하면 우리학교 미술
선생님과 이웃 여중 미술선생님이 친구여서 방학 때 그 여중학교 미술실에서
그림연습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화실에 나가니까
자연히 여학생들과 친하게 되었다. 몇몇 여학생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도
정애란 여학생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 날더러 '오빠 오빠'하고
따르길래 나를 좋아하는(사랑하는) 줄 착각하여 나중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키도 무척 큰 미인이었다. 정애는 얼마
동안 화실에 나오더니 나중엔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를 기다리는
일로 온 신경을 다 썼다. 그래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
때의 일기장을 보면 온통 그 아이의 이야기뿐이다. 일년이 지나 3학년
말이 되어 그 아이가 다니는 외국어 학원 앞에서 그림을 들고 서서
기다렸더니 자기 집 근처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지금 오빠가 입시를
코 앞에 두고 이럴 때냐고, 대학가면 더 좋은 여학생이 많다고,
정신차리고 공부하라고 한다. 나는 화도 나고 오기도 돋고 해서 그
길로 공부를 해서 알아주는 미술대학에 합격했다. 합격한 날 그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한다고. 그러면서 자기 언니가 이화여대에 다니고
있는데 그림 지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 뒤로 가끔 연락도 하고
지냈는데 뒤에 가서 날 독려해 준 그 정애가 늘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 정애는 지금 미국에서 화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 그림을 전시하고
싶어했는데 나는 만화를 그리고 있어 전시가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참 고마운 일이다.
박재동 선생님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으며
휘경고 중경고 미술교사를 거쳐 88년부터 96년까지 한겨레신문의
시사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우리만화연대모임 이사를 지냈으며 현재 (주)오돌또기 총감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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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1일/ 통권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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