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나는 이런 내담자들에게 부모를 사랑할 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설명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정말 좋아하지 않고 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사람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내면이 강하다는 방증이다."
나쁜 양육자(부모)에게서도 좋은 아이가 나올 수 있을까? 나쁜 양육자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나쁜 양육자를 아이는 사랑할 수 있을까?
최초로 ‘신체 감정 통합 치료법’(SEI, Somatische Emotionale Integration)을 만든 심리치료사이자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로 알려진 다미 샤르프의 신작 「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의 ‘좋아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 챕터를 읽으며 서로 다른 양육 태도와 관계를 가진 엄마와 아이를 다룬 세 개의 영화가 동시에 떠올랐다. 하나는 2009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다른 하나는 2017년에 개봉한 <플로리다 프로젝트>, 마지막으로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일본 영화 <마더>이다.
먼저 한국 영화 <마더>. 이제는 전 세계가 알아보는 봉준호 감독이 2009년에 만든 작품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영화다. 시골 읍내에서 약재상을 하며 아들과 단둘이 사는 엄마. 어리숙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표면적으로는 경계성 지능으로 보인다) 아들이지만 그녀에게 아들은 이 세상의 전부이다. 어느 날 마을에서 한 소녀가 살해당하고 아들이 범인으로 몰린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까지 백방으로 뛰는 엄마. 하지만 경찰은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고 변호사에게는 호구취급을 당한다. 결국 아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범인을 찾아 나선다. 아들은 살인범일까 아닐까. 실제로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이 아들을 지킬 수 있으며 설사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엄마인 자신은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다는 믿음뿐이다. 잘못된 믿음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잘못된 방식으로 보호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일까 또 다른 방임, 또 다른 학대일까? (독자님이 아무리 뒷이야기를 궁금해하셔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더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두 번째 영화는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랜드 주변 낡은 모텔에서 살아가는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어린나이에 미혼모로 딸을 낳고 지원금을 타내거나 짝퉁 물건을 팔기도 하고 심지어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엄마와 사는 7살 무니. 엄마와 함께라면 어디서 뭘 하든 마냥 행복하다. 비록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엄마지만, 엄마는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무니를 항상 즐겁게 해준다. 사회복지사들이 무니의 생활환경을 보고는 아동학대라며 보호시설로 데려가려 했을 때도 엄마는 끝까지 무니를 놓지 않으려 했다. 엄마도 무니도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봤을 땐 무니가 놓인 환경은 ‘옳지 않다’. 이런 엄마는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것일까? 아이에게는 엄마와 함께하는 비참한 환경보다 보호시설이 나을까? 이것도 부모의 사랑이니 아이에게는 사랑을 주는 것이 맞을까? 시간이 흐른 뒤 무니는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좋은 아이로 자랄 수 있을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와 파스텔톤의 모텔 위로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플로리다의 날씨, 꿈과 환상의 디즈니랜드. 그리고 이와는 대비되는 비참한 삶과 대책 없이 살아가는 엄마의 태도는 보는 이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며 질문을 계속하게 만든다.
마지막 영화는 앞의 두 영화로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더욱더 힘들게 할 수 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조부모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어, 11월 현재 전 세계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는 일본 영화 <마더>다. 엄마 아키코는 아들 슈헤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슈헤이에게 자신의 여동생이나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오게 시키거나 거짓말로 엄마의 사기행각을 돕게 한다. 도움을 주려는 주변인들, 가족과의 갈등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그녀의 옆에는 슈헤이만 남는다. 빚에 쫓겨 여기저기 떠돌고 그사이에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엄마를 슈헤이는 떠나지 않는다. 비참하고 비굴한 일을 당해도 엄마에게 뺨을 맞고 엄마의 남자에게 주먹질을 당해도 그저 묵묵히 참아낼 뿐이다. 대안학교를 보내주고 낡은 책을 가져다주는 사회복지사를 험하게 대하고 가져온 책을 내던져버리는 엄마에게 “학교에 계속 가면 안 돼?”라고 단 한번 물었을 뿐이다. 그러다 결국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갈 때까지 간 엄마가 외조부모를 죽이면 유산은 자기 것이라는 말로 간접적으로 살인을 종용하고 슈헤이는 그마저도 말없이 따른다. 소년원에 갇힌 그를 찾아온 사회복지사에게 그래도 자신은 엄마를 사랑하며 엄마는 내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슈헤이. 이것은 사랑일까? 슈헤이는 나쁜 양육자에게서 나온 좋은 아이인 것일까?
다시 한 번 다미 샤르프의 말을 생각해본다. ‘끔찍한 사람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내면이 강하다는 방증이다.’ 끔찍한 양육자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내면을 가질 수 있도록 학대받거나 상처 입은 우리 아이들, 청소년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지만, 그 엄청난 임무 앞에서 자신 없어지는 우리의 내면도 사실은 슬쩍 걱정이다._KYCI